板谷波山 이타야 하잔 ( Itaya Hazan,1872—1963)
1872(明治5)年 茨城県真壁郡下館町に生まれる
1887(明治20)年 上京
1889(明治22)年 東京美術学校彫刻家 入学
1894(明治27)年 東京美術学校彫刻家 卒業
1896(明治29)年 石川県工業学校彫刻科 主任教諭
1898(明治31)年 石川県工業学校 陶磁科担当
1903(明治36)年 辞職 上京 / 京田端に築窯
1906(明治39)年 初窯を焼き上げ好成績を得る
1907(明治40)年 東京勧業博覧会で3等受賞
1908(明治41)年 日本美術協会展 受賞
1917(大正6)年 第57回日本美術協会展 1等賞金牌受賞
1927(昭和2) 年 帝展工芸部審査員に就任 / 「東陶会」を主宰
1928(昭和3)年 第3回帝展 帝国美術院賞受賞
1929(昭和4)年 帝国美術院会員
1934(昭和9)年 帝室技芸員
1945(昭和20)年 戦災で家を失う / 下館に移住
1953(昭和28)年 文化勲章受章
1960(昭和35)年 重要無形文化財保持者に認定されるが辞退
1963(昭和38)年 逝去
板谷波山 作家
이타야 하잔 기념관
이타야 하잔의 작품은 현재 토쿄의 이데이쓰 예술박물관에 250점이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의 창시자 이데미쓰 사조(1885-1981)은 메이지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보물들이 서양의 수집가들에게 팔려나가는 것을 많이 목격한 다음,
일본의 후세를 위해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박물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1920-1930년대에 그의 작품을 폭넓게 수집했다.
당시까지 일본의 전통은 도자기를 만들었을 때 만든사람의 이름이 없는 무명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오랜 전통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 이타야 하잔이었다.
그리고 분업화된 생산공방에서도 주형,성형을 한 사람이 아닌 마지막으로 도자기에 그림과 장식을 한 사람의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일반 상업도자기가 예술품으로 격상되는 것이었다.
이타야 하잔은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이바라키현의 시모다데에서 간장소스 제조업자의 8남매중 막내로 1872년에 태어났다.
메이지시대에 들어선지 4년이 지난 후라서 막대한 사회적 변혁이 시작된 시기였다.
일본은 1850년대 후반 서방세계에 문호를 개방했고 자신을 서방의 여러 나라와 동등하게 대접받기를 열망했다.
메이지시대는 현대화의 물결이 과학과 기술분야 뿐 아니고 예술과 공예분야에 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당시까지는 일본말에는 서구에서 쓰는 “fine” 또는 “applied” art에 상응하는 단어조차 없었는 데, 1867년 국제만국박람회에 처음 참석하면서 그 의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메이지정부는 일본의 전통문화에 대한 두가지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 데, 한쪽은 서양화되는 쪽이고,
다른 쪽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인데 교육분야에서 이것을 맡아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현재의 토쿄국립박물관인 황실박물관을 설립했는 데, 이것은 토쿄예술학교와 같이 국가기관에서 전통문화를 지키려고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타야 하잔이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 토교로 간 것은 그가 17세때였고, 에도시대의 나무조각품을 현대화시킨 것으로 유명한 다카무라 코운의 학생이 되었고,
코운의 스타일은 하잔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이다.
이타야 하잔은 1894년에 졸업한 후 학교에서 조각을 가르치던 중 쿠타니야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학교가 문을닫자 중국의 전통도자기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모든 것을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유약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1903년에는 토쿄로 이주한 후 타바야 예술인촌에 들어가서 가마를 짓고 작품제작을 시작했고, 같이 작업할 도우미 겐다 이치마스를 고용하여 그와 함께 평생을 작업했다.
특히 1910년에는 일본의 위대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소설 소레카라 “그리고 그 때” 가 출판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 데,
사회의 규범을 따라 살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삶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것은 당시 고대의 폐가마에서 부셔진 도자기 조각을 열심히 모으던 이타야 하잔에게는, 이러한 사회적인 변혁은 고무적인 것이었다.
이런 변혁은 당시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문화가 격변하는 사회분위기 밑에서 하잔은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를 추구할 수 있었고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모델은 별도로,
20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새로운 추세까지 모두 작품에 반영을 했다. 그래서 결국 동양과 서양의 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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