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영국이 받은 `황제의 선물`은 온통 茶였다

썬필이 2021. 6. 4. 08:30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1) 영국이 받은 `황제의 선물`은 온통 茶였다

1793년, 영국인 700명이 배를 타고 중국에 왔다.

7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몇 달 동안 배 위에서 먹고 자고 싸면서 바다를 건너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며 중국까지 온 표면적인 이유는 중국 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생일은 벌써 2년 전에 지났다.

그들이 뒤늦게 중국에 온 진짜 목적은 기존에 중국이 외국에 열어놓은 단 한 군데의 항구 광저우 외에 다른

개항지를 늘리고 관세를 낮추며 조계지를 설립해줄 것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미 100여년 전부터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 차는 영국에서 인기가 많았다.

귀족부터 직물공장에서 밤샘 근무하는 직공까지 차가 없으면 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소비했다.

너무 인기가 많아 문제였다. 그 결과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해마다 많은 적자를 보고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무역 구조를 개선해 적자를 만회해볼 생각이었다.

청 황제를 만나러 온 사절단을 수행했던 화가가 그린 황제와 사절단이 만나는 장면. .

중국 정부는 이들에게 기다란 깃발을 하나 보내왔다. 깃발에는 ‘영길리진상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영길리(英吉利)’는 잉글랜드를 중국식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

문제는 ‘진상단’인데, 여기서 이 사절단 성격에 대한 영국인과 중국인의 관점 차이가 드러난다.

영국인은 자신들을 사절단이라고 생각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황제에게 진상하러 온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작은 나라의 신하라고 생각했다.
영국인은 황제에게 줄 선물도 준비해왔다.

천구의, 지구의, 천문 관측 계기, 화포, 총칼 등의 무기와 담요와 안장, 운동 기구, 망원경, 모형 선박 등

총 19종이었다.
선물을 본 황제는 적이 충격을 받았나 보다.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물건 중 어떤 것은 우리나라에 없는데, 영국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라.”
황제는 솔직하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건륭황제는 그런 최첨단 과학의 산물을 이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영국인과 중국 황제가 만나기 전부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황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절을 할지를 두고 영국인 사절단과 황제의 신하들이 실랑이를 했다.

황제의 신하들은 영국 사람들이 중국 황실 예를 따라 황제에게 절을 할 것을 요구했다.

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들의 왕에게 하는 식으로 한쪽 무릎만 꿇겠다고 맞섰다. 황제의 신하들이 말했다.
“미얀마 왕도 황제를 뵈러 오면 이렇게 절을 합니다. 당신들도 그렇게 해야 형평에 맞습니다.

당신들이 제대로 절을 하지 않으면 미얀마 왕이 당신들은 예의도 모른다고 웃지 않겠소?

바지가 불편해서 다리를 못 구부린다면 우리 식으로 편한 옷을 맞춰 드리겠소.”

그러나 황제가 원했던 것은 이런 식으로 절하는 것이었을 테다.

동시에 신하들은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 영국 사람들이 우리처럼 두 다리를 구부려서 절을 하지 못하는지라 지금 다리를 구부려 절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 사절단은 중국 황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절을 했을까?

중국 쪽 기록에 의하면 영국 사람들이 중국식으로 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사절단을 따라왔던 화가는 영국 사절단 단장 조지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굽히고 황제에게

절하는 모습을 그렸다.
▶차 소비 너무 많았던 영국, 심각한 무역 적자에 골머리
다만 분명한 것은 황제가 영국 사람들의 요청을 모두 무시했다는 것이다.
“우리 천조(天朝)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외국에서 무엇을 수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너희 양인들이 우리의 차, 자기, 비단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하니 광저우를 열어줬다.

이것만 해도 하늘 같은 황제의 은혜이니 영국 국왕은 주인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라.”
이쯤 되면 영국 사람들이 먼바다를 건너 황제를 보러온 공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셈이나 다름없다.

황제는 그런 영국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선물을 내렸다.

본래 중국 황제는 주변국에서 조공을 하면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답례로 줬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에게도 갖가지 진귀한 선물을 안겨줬다. 선물 목록에 차가 많았다.

총 27회 선물을 내렸는데 그중 15회에 걸쳐 차가 선물 목록에 포함됐다.

보이차 단차(團茶) 124개, 여아차 34개, 차고(茶膏) 26갑, 전차 28개, 육안차 48병, 무이차 24병,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차가 32병이었다.

청나라 황실 창고에서 발견된 오래된 보이차 단차. 건륭황제가 사절단에게 선물한 차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보이차 단차는 찻잎을 단단하게 뭉쳐서 만든 것이다. 좋은 원료로 만든 고급차였다.

영국인들은 커다란 공처럼 뭉쳐 놓은 차를 처음 봤다.

그들이 마셨던 차는 찻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것(산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공처럼 생긴 단차는 찻잎에 접착제 물을 풀어서 뭉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글로도 남겼다. 당시 사절단 부단장이었던 스탠튼 훈작이 남긴 ‘중국출사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차는 잎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접착제 물을 찻잎에 섞어 공처럼 만든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공처럼 생긴 차가 가장 고급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영국 사람들이 보기에, 이 차는 중국 사람들이 늘 마시는 차보다 못한 것 같다.

그런 차들은 더 먹기가 편하다.”
물론 단차는 접착제를 섞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차에 본래 펙틴이라는 천연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분이 있는데, 그 성분이 뜨거울 때 녹는 성질을

이용해 만들었다.

이런 차는 단단하게 뭉쳐진 것일수록 고급이었다.
결국 영국인 사절단은 목적했던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이때 중국 황제는 새로운 깃발을 내려줬다.

그 깃발에도 ‘영길리진상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깃발의 ‘영길리’는 ‘英吉利’라고 쓰지 않고 각 글자 앞에 ‘입 구(口)’ 자를 더했다.

개가 짖는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도 앞에 입 구 자를 붙여서 ‘吠’라고 쓴다.

영길리 각 글자 앞에 입 구 자를 붙인 것은 ‘개 짖는 소리를 하는 작자들’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돌아간 영국 사람들은 아마 속으로 단단히 별렀을 것이다.

그 결과가 몇십 년 후의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다.  - [신정현 죽로재 대표]

https://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21&no=388771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1) 영국이 받은 `황제의 선물`은 온통 茶였다

1793년, 영국인 700명이 배를 타고 중국에 왔다. 7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몇 달 동안 배 위에서 먹고 자고 싸면서 바다를 건너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며 중국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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