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외로운 영국 왕비 캐서린 `차`에서 위안을 찾다

썬필이 2021. 6. 5. 10:04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2) 외로운 영국 왕비 캐서린 `차`에서 위안을 찾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부동의 1위를 지켰다.

영국 사람들의 차 사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창 차를 마실 때는 하루 9번도 마셨다.
그러나 유럽에서 제일 먼저 차를 마신 이들은 영국인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1610년에 처음 중국 차를 수입해 갔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차를 마신 나라로 당연히 네덜란드가 꼽히고, 포르투갈 사람들도 비슷한 시기에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국에 처음 차가 전해진 것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를 통해서였다.

당시 차는 무척 비싸고 귀해서 왕실 최고 행사나 접대에만 사용됐다.
왕실과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차의 매력에 빠진 것은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 브라간자 덕분이었다.

그녀는 북아프리카 탕헤르와 인도 뭄바이에 위치한 7개의 섬, 동인도와 브라질에 대한 무역 특권 등 막대한

지참금을 갖고 영국 왕 찰스 2세에게 시집갔다.

캐서린의 지참금에는 221파운드의 중국산 정산소종 홍차도 포함돼 있었다.

캐서린은 결혼 생활 내내 많이 외로웠다. 남편 찰스 2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정부를 둔 왕이었다.

캐서린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임신 중인 정부와 식사를 하느라 마중도 나오지 않았고 그 후로도 7일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캐서린은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고 영어도 서툴렀다.

영국에 처음 차를 소개한 캐서린 왕비.

캐서린은 이런 시름을 차로 달랬다.

영국에 올 때 배에서 내려 제일 먼저 한 일이 뱃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마신 것이었다. 중국산 홍차였다.

캐서린은 티파티를 열어 귀족 부인들을 초대했다.

캐서린은 작은 중국산 찻잔으로 차를 마셨는데, 차를 마시는 방법이나 차를 우리는 동작이 우아하고 더없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곧 차는 영국 왕실과 귀족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고 상류층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비싼 중국산 실크옷을 입고, 중국산 찻주전자와 찻잔을 차려놓고 부를 과시했다. 값비싼 설탕도 넣었다.

중국 자기는 튼튼해서 뜨거운 찻물을 먼저 붓고 나중에 우유를 넣어도 깨질 염려가 없었다.

영국산 그릇은 뜨거운 찻물을 먼저 부으면 열을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차가운 우유를

먼저 붓고 찻물을 나중에 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는 상류층에서 중류층으로 또 노동 계층으로도 전파됐다.

그러나 차 소비가 너무 급격히 증가하면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게 등장했다.

차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실험도 진행했다.
반대파는 돼지를 2개 그룹으로 나눴다.

A그룹 돼지에게는 물만 먹이고 B그룹 돼지에게는 차를 먹였는데, 물을 먹은 돼지는 멀쩡했지만 차를 먹은

돼지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다 모두 죽었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차를 마시면 심각한 영양 결핍에 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실 이런 의견을 낸 사람들이 정말로 소비자 건강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차 소비로 국가 경제가 위축될까 걱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논쟁이 격렬해질수록 차 마시는 사람은 계속 늘었다.
영국 정부는 차 소비를 줄이기 위해 차의 관세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18세기 초 53%였던 관세가 1783년에 114%로 올랐다.

정부가 세금을 많이 부과하면 필연적으로 밀수가 횡행한다.

밀수를 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만큼 이익이 더 남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중국 차 역사에서도 수차례 증명됐다.

중국 정부는 국경 너머 유목민에게 차를 주고 전투마를 교환했다.

국가의 사활이 걸린 말을 차와 바꿔 오니 자연히 차 거래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세금도 높게 매겼다.

그러나 세금을 많이 올릴 때마다 여지없이 밀수가 들끓었다.) 밀수가 영국 경제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관세를 12.5%로 낮췄다. 관세가 낮아지자 소비자 가격도 낮아졌다.

이때부터 영국 사람들 차 소비가 4년 동안 2배로 증가했다.
차가 단지 영국 사람의 생활 방식만 바꿔 놓은 것은 아니었다.

차는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새로운 증기기관 특허를 냈다.

증기기관은 와트 이전에도 있었지만 열 손실이 많고 석탄 소모도 많았다.

와트가 만들어낸 안전하고 효율적인 증기기관은 단순히 광산에서 지하수를 배출하는 용도로만 쓰이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광물을 운송하는 기관차에도 쓰였다.

곧이어 증기기관을 이용한 방적기도 개발돼 면사가 대량으로 생산됐다.

영국은 숨 막히게 산업화의 길을 달려갔다

식민지 차별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보스턴 티파티. 이는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영국으로 수출했던 홍차잔 세트. 중국 자기는 영국산보다 튼튼해 인기가 높았다.

▶영국 정부, 차 소비 줄이기 위해 관세 높이기도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에 식사와 함께 차를 공급받았다.

그들이 마신 차는 싸구려 찻잎에 당밀이나 흑당으로 단맛을 낸 것이었다.

보잘것없었지만 이 차를 마시면 열량이 보충됐다.

또한 그들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방적기 앞에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술 대신 차를 마셨다.

차가 보급되기 전 영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알코올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물이 너무 오염돼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균 하루 3ℓ의 알코올을 들이켜 중독됐던 사람들이 차를 마심으로써 중독에서 벗어났다.

카페인 덕분에 차를 마시면 정신까지 맑아져서 사고 위험도 줄어들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니 오염된 물을 매개로 전파되던 질병도 대폭 줄어들었다.

차를 마신 덕분에 영국 사회 전체가 매우 현대적인 단계로 진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의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국 식민지였던 신대륙이 독립하는 데도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신대륙 사람들 역시 홍차를 많이 마셨다.

영국 정부가 자국으로 수입하는 차에 대단히 높은 세금을 부과하던 시기였는데, 신대륙에는 본국보다 더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식민지 차별 정책에 분노한 신대륙 사람들은 아예 차를 마시지 않거나 차 아닌 다른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저항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차 대신 호두나무 잎을 우려 마셨다.

그러나 차보다 더 맛있는 것은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지 사람들이 항의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1773년 차를 실은 영국 동인도회사 배가 보스턴 항구에 들어오자 분노한 군중이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손에

도끼를 든 채 배로 올라갔다. 그들은 차가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부수고 바다에 버렸다.

1만8000파운드어치 차 342상자가 3시간 만에 바다로 사라졌다.
이는 영국 식민 정부에 대한 신대륙 식민지의 반감이 분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반년 후 신대륙 독립전쟁이 시작됐고, 마침내 1776년 미합중국이 탄생했다.

미합중국의 탄생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요인이 ‘차’였던 셈이다.  - [신정현 죽로재 대표] 

https://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21&no=435146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2) 외로운 영국 왕비 캐서린 `차`에서 위안을 찾다

영국에 차를 알린 포르투갈 공주

news.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