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야기

정호다완에 대하여

썬필이 2018. 8. 9. 19:34

정호다완에 대하여

1. 정호다완의 유약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정호유약은 부드러우면서도 흡수 배출력이 강하여 쉽게 차때같은 차심이 들지 않습니다.
촉감은  손에 달라붙는 느낌으로 촉촉하며, 통기성이 뛰어나서 사용횟수에 따라 우물 석축 
모양의 관입이 형성되며, 유약 자체에 기포의 함유량이 많습니다.
(기포의 높은 함유량은 통기성 이외에도 빛의 반사에 의한 색감의 깊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유약의 특성은 정호유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고려말 질좋은 상감분청에서부터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2. 정호다완의 유색은 어떠할까요.
흔히 정호의 유색을 비파색이라 하지만, 실제는 상감분청계에서부터 내려오는 
청색유(청록, 암록 등)도 있고, 牙白 卵白색의 백유도 있으며, 노란빛을 띠면서 유약이 두꺼운 
부분은 청색 기운을 띤 비파색유도 있습니다.
다만 비파색유와 백유의 경우 투명 내지 반투명의 성격이 있어서 사용함에 따라 유층이 
맑아지고 태토와의 흡착도가 높아지면서태토의 노란 빛을 반영하여 점점 더 노란빛(비파색)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청자의 회청 회록 녹청색과 청정호의 녹청 내지 암록색은 청정호의 태토가 좀더 백태에 가깝다
(백토의 함유량이 더 높다는 취지)는 것일 뿐 그 유색은 거의 비슷하며, 보관상자에도 청정호라 
표기된 일본 전세 청정호다완의 경우 실제 유색도 암록 내지 녹청색인 경우가 많으며, 
원래 녹청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나 산화염 소성 과정에서 암갈 내지 담갈색으로 발색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전을 향해 물레선이 상승하며 벌어지는 경우를 청정호라 한다 
하나 저는 이러한 분류는 위 사용과정에서의 태토와 유약의 흡착 등으로 마치 색이 변한 듯한 
면이나 소성과정에서의 담갈색 요변이 온 경우 등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은 현대 일본인들의 
편의적 분류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정호다완의 태토는 어떠할까요.
정호협의 경우 태토와 유약 등에서 정호보다는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나 
명확치는 않고, 정호다완으로 분류되는 다완의 경우에도 그 태토가 동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 핑크카오링계의 정화기능이 좋은 내화백토와 점력 유지를 위한 점토,
고온에서 기형 유지를 위한 카오링 도석(마치 돌가루나 흰모래 처럼 보이는 것)을 빻아서 넣는 
등으로 태토의 조합을 한 것이 많습니다.
(당시 수비하지 않아서 흰모래 입자가 보인다든가 하는 주장은 사실 납득키 어려운 주장입니다.) 
소성 후 태토의 특성은 두드렸을 때 공명음이 좋고, 두께에 비해 보기보다 가벼운 편이며,
흡수배출력이 좋다(굽 접지면에 시유되어 있지 않은 경우 차 성분 중 탄닌을 걸러 배출하는 
과정에서 검게 되었다고 보고 있지요)는 기능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정호다완은 어디서 만들었을까요.
현재 웅천 두동리라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지요.
웅천이 삼포 중 하나인 제포와 인접하여 있었다는 점과 도요지에서 발견된 도편의 매화피 
흔적 등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그러하듯 언제나 참고 정도이지 단정적 생각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웅천 두동리 요지 발굴조사에 의하면 가마의 특징이 상당히 좁고 긴 계단식 가마이며,다른 
지역과 달리 할석과 점토를 섞어 요벽을 축조한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좁고 긴 계단식 가마는 열 손실 없이 중간 중간에 불을 때어 소성 온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하지요.
위 발굴조사된 기물은 쇠퇴기 양식을 보이는 귀얄분청과 조질회청사기 등이 발
굴되었다고 하지요. 
위 발굴조사만으로 바로 웅천 두동리가 정호의 산지라고 확정지을 만한 유의의한 유물이 
발굴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웅천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유로 김해와의 상관 관계 
하에서 웅천 요지를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다기 '보아'(보시기?), '와기'(연질계 그릇?) 등을 김해장인을 시켜서 만들어 
주었다는 조선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 김해 어소환 다완과 각종 주문 김해 다완 등을 
수입하여 간 점, 김해 지역에서 조선 초기부터 매끄럽고 부드러운 유약과 치밀한 태토 등 양질의 
그릇들이 소성되었던 점 (김해 백유라는 말도 있음), 웅천 지역에서 유약의 질감이 고급스럽고 
태토가 치밀하고 성형이 섬세하면서도 물레선이 살아 있고, 품격이 있는 그릇에 대하여 
'웅천 긴까이'라 호칭하고 있는 점, 김해와 웅천이 산너머로서 조선 초기 웅천이 
김해에 속해 있었던 점, 웅천 발굴 조사결과 요의 조성시기가 도자 양식으로 보면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전반으로 보이는 점, 15세기 전반 자기소 도기소에 대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부분에 웅천 요지가 조사되어 있지 않다는 점, (당시 전국적 공납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조사였던 점에서 특수 부락으로서의 자기소가 있었다면 이 조사에서 누락될 만한 
이유가 없었겠지요.)
오늘날 김해라고 지칭되는 그릇들 중 비파색 유약과 태토에서 정호다완과 유사한 면을 보이는 
그릇이 다수 보이고, 고급스러운 성형과 유약 등 품격이 돋보이는 기물이 많은 점, 등에서 위 
웅천 요지 조성 이전의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기 사이에 김해를 주된 수요처로 한 김해 인근의 
요에서 정호다완 등을 소성하다가 그 일부 세력이 웅천등지로 이동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 정호의 성형상의 특색은 어떠할까요.
굽 내부를 비스듬한 경사로 깍으면서 소용돌이형, 팽이끝 모양의 처리를 한 경우가 많고
(다만 소관입 등이 치밀한 처리가 되어 있는 반면, 
대정호의 경우 대범하게 처리한 경우가 많지요.)
굽 외측면은 한번에 깍다보니 회전형으로 슬쩍 돌려준 듯한 희미한 죽절이 많은 편이며,
굽언저리를 대칼로 자국을 남기며 여러 경사 각도도 깍아낸 경우가 많지요.
이어서 물레선 흔적은 몸체 하단부, 허리부, 상단부 등 자유 자재로 이를 마치 음각 도안처럼 
활용하였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예술적 미감과 기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요.
6. 정호다완의 약속이란 어떠한 의미일까요.
조선 초기 정호 소성 당시 장인의 습성은 있되 약속이란 물론 없었을 것이고, 정호다완의 
약속이란 정호다완 재현을 위한 일본인들의 약속일텐데, 오늘날 이에 국한되어 정호다완을 
판단하는 것은 당시 장인들의 개성적 창의적면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실제 매화피가 고온에 녹아 거의 보이지 않는 대정호도 있으며, 굽에 죽절굽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물레 흔적이 거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는 바, 태토와 유약 등 본질이 
아닌 외형상의 특징을 괜시리 약속이라면서 생각하다가는 눈뜨고 정호를 몰라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7. 정호다완의 굽받침은 어떠할까요.
통상 태토빚음 받침을 사용하였으나, 내화토, 모래받침 등을 고려말 조선초기에도 
사용하였으므로 여러 받침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태토빚음 받침의 경우 그 흔적에 철분으로 인한 검은 점, 태토에 섞인 카오린 도석 가루로 인한 
흰모래 같은 자국 등이 보이고 있습니다. 
8. 정호다완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밥그릇 등이었을 수가 없다면서 제기라는 견해, 불단에 바쳤던 그릇이라는 견해, 발우라는 
견해 등이 있으나, 식기라면 왜 잡기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저는 당대의 용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외형상 할고대, 오기, 외측 돌기가 부착된 그릇들은 당초 용도가 제기였다고 추정되고, 
식기를 조상을 높이 받든다는 의미에서 평소보다 굽을 높이 하여 부장하였다 하여 그릇의 품격이 
낮아지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높은 굽이나 매화피가 뚜렷한 점이나, 물레선이 금속 제기의 음각선과 유사 하다는 등의 
근거로 제기설(물레선이 불교 만다라를 표시한 것이라면서 발우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요)을 
주장하는 점에 대하여는 당시 접시나 주병에도 매화피가 있는 경우도 있고, 물레선 역시 사천, 
하동, 김해 등지의 그릇 일반에서 높은 굽과 물레선 흔적이 보이는 점 등에서 그냥 재미있는 
주장이라 봅니다.
9. 대정호다완에는 출토품이 없을까요.
대정호 다완도 당시 부장하였다면 당연히 출토품이 있고, 일본 민예관 소장 '산복' 이라는 이름의 
밥그릇형의 대정호는 일제 시대 출토품이지요.
다만 대정호는 '주' 그릇으로서 부장량이 많지 않았을 것이고,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를 부장할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을 것이며, 그마저도 임진왜란 당시 전란 중에 도굴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많이 파손되었을 수 있겠지요. 또한 정호다완의 전체 조형의 깊은 품격 등에 비추어 관요 청자를 
만들던 핵심 1-2세대들이 만들고, 그후의 세습 세대들은 그 정도의 고도의 품격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면 그러한 면에서도 그 부장품의 수는 많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10. 정호다완을 만든 세력은 다른 그릇은 만들지 않았을까요.
정호다완을 만든 세력들은 용도에 따라 견수 등 경질계 그릇과 주병 등 여러 용도의 기물들도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정호의 본질을 알아야 다른 기물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지요. - 관음요에서

*** 정호다완 감상 기준
1.손물레 자욱
2.유약흘림과 매화피
3.죽절굽
4.굽 꼭지매듭
5.말차를 격불하기에 적합한 내부공간
6.내부 차고임자리
7.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적 자세

'도자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사리 백자  (0) 2018.09.14
자사호(紫沙壺)의 선택  (0) 2018.08.31
달 항아리  (0) 2018.08.05
조선 청자  (0) 2018.08.05
조선막사발 터 홍보는 '역사왜곡'이다  (0)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