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야끼(교토야끼, Kyotoware)
일본의 도자기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비젠야끼 같이 진흙으로 만든 것도 있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도 있고,
광택이 많이나고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고, 아주 단순한 것도 있다.
하지만 17세기 부터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교야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가마를 모두 부숴버리자, 중국도공들과 화가들이 1620-1630년 경에 모두 일본의
아리타현과 큐슈지역으로 수백명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의 진짜 기술자들이 왔다고 했다.
이들로 부터 배운 그림그리는 기술을 진일보 시켜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쿄야끼(쿄토야끼,
Kyoto ware)이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에서 배운 기술을 일본의 색상과 접목시켜 훨씬 화려하고 우수 디자인의 도자기로
탄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닌세이 노노무라이다.
그 덕택에 메이지시대에는 7천만개에 달하는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할 수 있었다.
닌세이 노노무라 - 교야끼의 아버지
닌세이 노노무라는 교야끼의 모든 기술적인 면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다.
닌세이는 17세기 중반까지 작품활동을 했지만 아직 현재에 만들어지는 교야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차항아리(tea-storage container)와 코고(향 상자,incense container) 로 잘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다른 것, 특히 차완(tea bowl) 도 아주 걸작을 많이 만들었다.
닌세이 노노무라의 탄생과 사망년도는 알려지지 않는데 탐바에서 태어나서 1647년경에 쿄토로 이주했다.
이주하기 전에는 세토지역에서 차항아리와 만드는 법과 도자기의 유약처리 기술을 완벽하게 배웠다.
그리고 쿄토에 와서는 오무로 가마를 세우고, 당시의 다도계의 최고전문가로 꼽히는
카오모리 소와(1585-1656)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오모리 소와는 닌세이의 도자기가 기레이-사비(지고한 단순미,elegant
simplicity)를 구현하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닌세이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보여주는 놀랄만한 작품들이 있다.
당시에는 overglaze 기법은 아리타야끼나 쿠타니야끼 같이 도자기 위에만 쓰는 방법이었는 데, 이것을
stoneware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다.
이같이 그는 항상 도전하며 안되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또다른 테크닉 하나는 무로마치 잉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철성분의 유약을 바르면서 페이트 기법을 이용해서 outline을 그려서 차완에 후지산 같은 것을 그려내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그리고 차완에 검은 유약을 발라서 마치 옻칠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도 전문가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있다.
도자기 분야에서 그가 처음 시도한 것 또다른 하나는 그의 작품에 서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작품의 바닥에는 그의 도장이 모두 찍혀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점토의 질은 대단히 잘 정제된 상태라서 마치 실크와 같이 부드럽다.
특히 닌세이의 특이한 직인은 그가 만든 모든 도자기와 그를 계승한 모든 자기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오가타 켄잔(1663-1743)과 아오키 모쿠베이(1767-1833)는 닌세이 노노무라를 계승해서 에도시대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교야끼(Kyoto Pottery)의 3대 거장이라고 불린다.
마사히코 사토는 그의 저서 ‘코토 도자기’에서 교야끼의 두가지 특징은 “한 구역을 보통 초록색이나 짙은
파랑색으로 완벽하고 뚜껍게 칠을 한다”
그리고 “ 다른 곳은 overglaze 디자인으로 부수적인 효과를 낸다” 라고 말한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면: 그가 도자기 기술을 배울때 중국식 디자인과 라쿠유약을 이용했고, 세토야끼와
쉬가라키야끼의 공방에서 생산되는 도기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스타일로 부터 배웠다고 해도 그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그만의 디자인의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그의 항아리인 차스보는 형태로 봐서 우아함의 극치이고, 항아리 두께는 누구나 만들 수 없을 만큼 얇고,
항아리의 벽체를 칠한 다양한 색체의 에나멜과 금은장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교야끼의 창시자(아버지)라고 불린다
- Stoneware에 에나멜을 칠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 도자기의 몸체를 얇게 만들고, 칠하는 방법을 달리해서 다양한 칠을 구현했고 금은장식을 이용했다.
- 당시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아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 처음으로 도자기에 직인을 사용했다.
- 물레를 잘이용해서 도자기를 믿을수 없게 얇게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닌세이 노노무라의 작품
(Photos from the Courtesy of Tokyo National Museum of Art)
이 차항아리는 밝은 에나멜로 칠해졌는 데 유명한 봄철 요시노산의 체리꽃이 만개한 것을 장식했다.
당시 이런 화려한 장식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화려한 것이었는 데, 요시노 노노무라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풍부한 금색과 은색을 underglaze로 칠해서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서 마치 꽃이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닌세이의 작품은 마치 얇은 바퀴와 같은 데, 이것도 도자기 벽체가 매우 얇아 전체적인 크기가
다른 도자기에 비해 작은 편이다. 크기 높이 35.7 cm [소유주: 마쓰나가 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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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교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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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명나라 도자기와의 비교
아래 그림은 명나라 도자기들인데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나라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도자기를 만들던 중국의 도기공들과 화가들
일본으로 이민을 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술이 일본의 도기공들에게 전수되었고, 일본은 그동안 전통도자를 만들던 기술자들이
고령토의 발견과 함께 백자를 생산하게 된다.
이에 그동안 국가에서 수백년 관리해 오던 608가지 색상을 도자기 제작에 사용하면서 중국의 당삼채보다
훨씬 화려한 색상을 가진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동안 쌓아온 잠재력이 고령토의 발견과 백자제작기술의 보급과 맞물려 도자기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명나라 강시 도자기 주발, 정교한 꽃그림과 다양한 색상이 인상적이다.
이 디자인은 가키에몬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일본과 같이 수백가지의 색상을 구현하지는 못하고 제한된 색상만 쓰고 있다.
17세기 명나라시대의 항아리, 교야끼와 사쓰마야끼가 짧은 시간에 얼마나 진보되었는 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백자를 만들어 그 위에 그림 그리는 방법을 일본 도기공들에게 가르쳐 주자
일본은 그보다 훨씬 진일보된 교야끼를 만들어 메이지시대에만 유럽에 7천만개가 넘는 도자기를
수출하게 되었다.
현대 일본의 교야끼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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