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코헤이지 (三浦小平二, 1933-2006) - 송대의 청자를 재현
일본에서 1955년에 예술공예분야의 인간무형문화제 선정제도가 시작된 후 하마다 쇼지를 시작으로 비젠,하기,
사라쓰 등을 여러가자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들이 인간문화재에 선정되었다.
1997년에는 미우라 코헤이지가 선정되었는 데, 미우라는 청자로는 처음으로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그의 청자 작품은 송나라시대 이후로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완벽한 청자로 평가된다.
미우라 코헤이지 이후에는 히로시 나카시마가 청자로는 두번째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미우라 코히이지는 청자를 연구하면서 남송시대의 구안지역 도자기를 중점적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사도섬에서 생산되는 붉은색 점토에 유약을 바른 청자는 매우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그의 개성있는 작품과 남송시대의 청자를 완벽하게 재현하여 국제적으로도 그의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많은 전시회에 초대되고 그의 작품은 전세계의 많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성과 남송시대 청자를 재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에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미우라 코헤이지는 니아가타현의 사도섬에서 1933년 도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우라는 1955년 토쿄국립대학을 졸업했는 데, 조각을 전공했다.
도자기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각의 기초를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각을 대학에서
전공했고, 지금도 그의 학생들에게 똑같은 조언을 한다고 한다.
사실 토쿄대학은 1953년에는 예술대학에 도예과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국보인 하지메 카토 밑에서
작업실과 가마를 만들고 카토의 문하생이 되었다.
미우라 코헤이지는 1957년 부터 청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기푸현의 산업도자기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계속 공부를 했다.
그 후 대만을 여행하면서 국립왕실박물관에 소장된 남송시대의 청자를 보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게되었다.
그때까지는 그는 아버지로 부터 전수한 방법으로 청자를 만들었는 데,
그가 살던 사도섬에서 나오던 붉은색의 흙은 청자를 만드는 데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가라키 현에서 흙을 가지고 와서 썼다.
하지만 대만의 박물관에서 남송시대의 청자를 보면서 그것의 바닥을 보았을 때 미우라는
놀라움을 금치않을 수 없었다.
남송시대에 만든 청자의 흙이 자기가 사는 사도섬의 흙과 아주 똑같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흙을 뒷마당에 쌓아놓고, 멀리서 비용을 지불해서 날라왔던 것이었다.
청자는 도자기 중에서 지고선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가장 만들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벽한 형상이 필요하고, 유약도 아주 정확하고 섬세하게 발라야 하며, 가마의 온도조절을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낮은 수율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미우라는 이런 낮은 수율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완벽한 청자를 얻기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미우라 코헤이지의 빙열(crackling)[1]이 가득한 옅푸른 색의 청자는 남송시대의 롱취안청자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자를 주로 연구하면서 남송시대의 구안도자기를 중점적으로 만들었는 데, 특히 사도섬[2]에서 생산되는
붉은색 점토에 유약을 바른 청자는 매우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그의 개성있는 작품과 남송시대의 청자를 완벽하게 재현하여 국제적으로도 그의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많은 전시회에 초대되고 그의 작품은 전세계의 많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성과 남송시대 청자를 재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에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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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빙열 (氷裂, crackling)
청자의 표면을 보면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이 표면에 미세한 금이 많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을 빙열이라고 한다.
빙열은 청자 태토의 수축율과 유약의 수축율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흠이 아니다.
청자는 유약을 바르고 섭씨 1200-1300도로 구운 후, 가마 내에서 식힌 후 꺼내게 된다.
이 식는 과정에서 유리가 된 유약층과 유리질로 변한 태토는 두께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수축율이
다르게 되어 빙열이 생기게 된다.
가마가 식는 동안 밖에서는 유약이 깨지며 빙렬이 생기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한다.
빙열은 내부의 흙의 수축이 심해서 생기는 빙열과, 외부의 유약의 수축이 심한 경우 두가지가 있다.
두 가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겉표면에 먹물을 칠하면 금간 곳으로 먹물이 스며들기도 하는 데,
이런 빙렬은 유약의 수축이 심해서 빙열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내부 흙의 수축이 심해서 생긴 빙렬로는 먹물이 거의 스며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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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섬 (佐波島, Sado Island)
사도섬은 일본의 니가타현의 동쪽에 있는 화산섬인데, 관광지로 유명하다.
특히 이 지역의 붉은색 토기가 유명해서 다도용기로 아주 인기가 높다.
붉은점토로 만든 다기로 차를 마시면 차맛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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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코헤이지 작품소개
미우라 코헤이지의 작품은 3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 송나라시대의 빙렬을 재현한 청자
- 현대적 스타일의 빙렬을 가진 청자
- 빙렬이 없는 청자
코히이지는 모든 청자를 사도섬의 붉은색 점토를 가지고 만들고 중동지역에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미우라 코헤이지는 사도섬의 붉은색 점토를 가지고 청자를 이렇게 만들었다.
청자는 유약을 발라 바탕을 가리는 것이라서 붉은 색이 보이지 않고 유약의 색만 보인다.
하지만 바탕이 붉은색이기에 특이한 색상을 보인다.
남송시대 롱취안청자와 미우라의 청자 비교
위의 청자화병과 색상의 tone이 다르게 구현을 했다.
송나라시대에 지역마다 청자의 tone이 다른 것을 재현한 것이다.
송나라시대 물병과 색상과 빙열의 정도가 거의 완벽하게 재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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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코헤이지의 청자를 송대 롱취안 물병과 직접 비교를 해보면 얼마나 완벽하게 남송시대의 청자를
재현했는 지 알 수 있다.
색상뿐 아니고 빙열의 정도까지 모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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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시대 롱취안청자
롱취안 청자 (龍泉, Longquan Celadon) -
송나라시대의 청자는 만든 지역에 따라서 이렇게 색상에 변화가 있고
빙열도 만드는 과정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의 청자색상도 지역적인 변화로 간주되는 것이지
새로운 변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우라코에이지의 현대청자
청자의 빙열이 깊고 균일하다.
같은 크기의 장석을 이용해서 빙열의 크기를 조절하고 유약을 두껍게 칠해 깊이를 더했다.
미우라 코헤이지의 빙열이 없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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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평
일본에도 청자를 만드는 도예가들이 많이 있고 작품을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송대의 롱취안 청자를 완벽하게
재현한 경우는 없었다.
청자를 만드는 기술은 그동안 단절되었기에 그것을 복원하는 노력이 많았는 데,
결국 그런 노력과 노하우가 쌓이다보니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하는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보기에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송나라시대의 청자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옛날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현대적인 기술로 깊은 느낌을 주는 빙열의 청자를 만들었고,
또한 자신의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삽입하여 빙렬없는 작품에 엑센트를 주기도 했다.
이렇게 청자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기반으로 일본도예에서 유일한 청자 인간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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