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예가

이수경 - 현대예술가

썬필이 2018. 11. 3. 21:12

이수경
이수경(1963- )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수여하였다. 
졸업 후, 프랑스 니스에서 Villa Arson Residency Program에 참여하였고 뉴욕 
브롱스미술관과 Apex Art, 한국 쌈지스튜디오와 경기창작센터에서 레지던시를 하였다. 
이수경은 조각, 설치, 영상,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등의 작품을 통해 전통과 현대, 
동양성 및 미술을 통한 치유의 기능을 제시한다. 폐기된 도자기의 파편을 에폭시를 
사용하여 맞추고, 금분섞인 카슈를 칠한 다음 불상에 사용되는 금박을 두 세번 정도 입히는 
과정을 통해 버려진 존재들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의 과정으로 버려진 존재의 상처와 아름다운 재탄생의 치유로 인한 
마음의 위안을 이야기한다. 
2006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해외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2008년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 프랑스 파리 루이뷔통미술관, 
2009년 일본 마루가메 현대미술관, 
2010년 독일 베타니엔미술관 등에 작품이 전시됐다.

이수경 作家

 이수경작가는 회화를 전공했지만 그림,조각,도자등 여러분야에서 작품활동을 하는데,
 그 중 사진에 보이는 "번역된 도자기"로 가장  잘알려져 있다. 
이수경은 2001년 알비솔라의 세라믹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으로 18세기 조선시대 백자를 
안나 마리아(Anna Maria)라는 현대 이탈리아인 도예가가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때 번역은 조선 백자를 현대 도공이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본떠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재현’이지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이수경은 마리아에게 백자를 모티브로 한 한국 현대시조, 예컨대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이 1947년 지은 <백자부(白磁賦)>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들려주고, 
떠오르는 심상을 도자기로 표현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언어 번역, 상상과 물질적 형상의 번역이 바로 이수경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한  ‘번역’이다.
번역의 결과물은 일견 동양의 여느 도자기와 유사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동양과 서양의  도자 문화에서 산출된 기존의 어떤 도자기 범주에도 들지 않는
이질적인 백자 화병 12개였다. 
그 12개 화병은 감상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해 있어 그만큼 익숙한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게 (trans-cultural) 한다.
또 특정 민족, 영토, 역사, 취미(taste)에 고정되지 않는 독특한 정서와 이미저리를 유발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독특성이 뿌리 없는 것,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선의 백자문화와 이탈리아 도자 공예의 교섭을 통해 발현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아주 깊은 뿌리에서 양분을 받아 성장한 오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문화적 이행과 협업을 통해서 실험적인 현대미술작품으로 탄생한
지금 여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번역된 도자기 알비솔라>는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가 고유하게 형성한
민족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탄생한 현대미술작품이다.
그리고 이수경이 그 작품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 실행한 <부모의 접시>는 거대서사에서 
벗어난 가족사(史)와 개인들의 기억이라는 원천을 통해서 현재화된 현대미술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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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보기

번역된 도자기 - 2007 도자기파편,엑폭시,알루미늄,24K금박 210 * 120 * 95cm
Translated Vase -The Other Side of the Moon - 2014
<북극성>, 레진, 가변크기, 2012
깨진 도자기를 이어붙인 번역된 도자기를 수도없이 만들어 펼쳤다.
<쌍둥이 성좌>, 전시 전경, 2012

이수경은 Korea Artist Prize에서 2012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했다. 
그곳에 실린 이수경에 대한 평론을 실어왔다.
(읽어도 작가의 작품과 같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이나 유럽의 작가들 작품은 평론가들의 말이 아주 짧다.
많은 말이 필요없이 누가 봐도 작품이 주는 느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